키보딩 놀이동산

학위논문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이다. 

학위논문이 정상적으로 통과된다면, 여덟살에 입문해서 38세에 학생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고보니 30년 동안을 학생으로 살았구나. 


박사과정이라는 코스는 이전까지의 학생과는 많이 달랐다. 

한편으로는 학부생들에게는 강사라는 신분으로 경제원론이나 경제수학 같은 과목들을 가르쳤고, (사실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나 자신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구자의 신분으로 내가 정한 주제를 내가 풀어나갔다. 

멘토같은 선생님들은 계셨지만,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었고, 거의 무제한의 자유가 주어졌다. 

어쩌면 나는 이 무제한의 자유를 충분히 만끽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즐거운 나날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어떤 일을 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의 역량이 허용될 때까지는 인간의 물적 토대를 연구하는 연구자로써 살아나가고 싶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떤 형태로 이룰 수 있을지는 나 자신조차 잘 모르고 있다. 여기에 '아기'라는 또 하나의 초대형 퀘스트를 함께 얻게 된다. '아기'와 더불어 사는 삶은 어떤 형태가 될까.. 이제 2주 후면 알게 되겠지. 


현실은 이러한 나의 상황과는 거시적이고 추상적으로 관계를 맺었겠지만 구체적으로는 다가오지 않은채 소용돌이치며 흘러가고 있다. 정작 이러한 소용돌이에 한 흐름을 보태고자 선택한 경제학이었지만, 지금 쓰고 있는 논문들은 당장에 그러한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DM옹의 말대로 스피릿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할텐데..


애초 쓰고자 한 주제에서 한참 벗어났다. 논문 교정보다가 잠깐 눈붙이기 전에 문득 글을 좀 쓰고 싶어서 열었는데 아무래도 간만에 신변잡기나 늘어놓게 될 것 같다. 


애초 쓰고자 한 주제 얘기 잠깐 하고 자야겠다. 애초 쓰고자 한 주제는 키보딩이다. 


논문 쓰는 와중에 갑자기 기계식 키보드를 쓰고 싶어졌던게 발단이었다. 주변에 기계식 키보드를 쓰는 유일한 (줄 알았던) 선배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았더니, 서브 키보드를 하나 빌려주겠다면서 세미나 때 직접 꼼꼼히 청소까지 해서 주셨다. 이게 시작. 체리 G80-3497 신형 갈색축 키보드. 쳐보니 재밌다. 청축밖에 몰랐었는데, 갈축도 생각보다 재밌다. 좀 더 자주 쓰고 싶어서 학교에 가져왔으나, 소리가 너무 커서 제대로 쓰지 못했다. 혼자 밤새는 동안은 실컫 썼고, 그동안 손끝이 즐거웠다. 

하는 일의 성격상 키보드를 쓸 일이 많아 이런 종류의 기계만큼은 좋은 것을 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한 켠에 깔려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런 감회를 트위터에 썼던게 화근이었달까. 과동기로부터 소리 작은 키보드도 있더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알고보니 키보드매니아의 커스텀키보드 KMAC 프로젝트에 스탶으로 있던 '낭만곰'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분이 KMAC OSX 테스트를 위해 친구에게 베타테스팅을 맡겼던 것. 우연찮게도 KMAC 프로젝트 직전이었고, 나도 거기에 참가했다. 한동안은 무슨 말이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지난 글들을 읽어나갔지만 키보드매니아의 지식은 게시판+댓글 구조로 정보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은 형태로 쌓여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그곳에 틈틈히 들어가서 이제는 대강의 지식을 쌓게 되었고, KMAC 공동제작 프로그램에도 참여했다. 재료비만 40여만원이 드는, 그것도 완성품이 아닌 재료값만.. 조립은 내가 직접 납땜을 해야 한다. 그나마 커스텀 키보드 중에는 펌웨어 업그레이드나 칩까지 일일히 납땜해줘야 하는 것들이 대다수인것을 감안하면 KMAC은 매우 조립하기 쉬운 축에 속한다. 부푼 꿈을 안고 참가했다. 

그렇게 키보드 동호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otd라는 키보드 동호회도 알게 되어서 그곳에도 가입했다. 둘은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 간단하고 명확한 표현이 있을 것 같지만, 생각나지는 않는다. otd가 좀 더 사람들이 정을 추구한다는 인상이었다. 키보드에 대해서는 두 동호회 모두 아예 기판부터 설계할 수 있는 실력자들이 즐비하다. 아예 키보드 공방을 운영하는 사람이나 키보드 유통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키보드가 사람을 끄는 묘한 힘이 있는지, 동호회 사람들은 수십년 된 낡은 키보드나 중고 키캡에도 만만찮은 비용을 쏟아붓는다. 나 역시도 키캡을 구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 특히 내가 좋아하는 베이지색에 특수키는 회색 계열인 소위 '투톤 베이지' 키캡이 매우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지금은 키보드 하나 조립하는데 키캡만 현재 세 벌을 가지게 되었다. 뭐, 아마도 그 키캡들만큼의 키보드를 조립하게 될 것 같다. 

키캡은 키보드인들 사이에서 매우 귀한 존재다. 스위치나 하우징은 어떻게든 되지만, 키보드의 배열이 키보드마다 조금씩 다른 이유로, 원하는 색에 원하는 배열을 가진, 거기에 키캡상의 인쇄방식마저 적절한 키캡을 찾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특히 스페이스바가 있는 최하단열이 가장 불규칙성이 높기 때문에 사이트에 가면 키캡을 찾는 사람들의 하소연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는 입문자치고는 정말 운이 좋았던 편이다. 기적같은 운으로 정말 귀한 키캡을 한 셋 구했고, 또 하나는 낭만곰님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도움을 주어 베이지 투톤을 얻었다. 유럽인들이 쓰던 것을 키캡만 뽑아 온 것이다. 덕분에 키캡 세척이라는 것도 해보았다. 헌 키캡은 지저분할 가능성이 높으므로 동호회 사람들은 틀니 세정제를 써서 키캡을 청소한다고 한다. 낭만곰님이 키캡을 보내주면서 한 알 동봉해 주셔서 나도 따뜻한 물에 30분 담그고 안경천으로 하나하나 닦아줬다. 요즘 키보드는 대체로 검정으로 가는 추세라 고전적인 베이지 투톤 키캡은 점점 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난 베이지 투톤이 가장 좋던데.. 사람들의 취향은 알 수가 없다. 인쇄 방식은 아예 두 종의 플라스틱을 섞어 사출해버린 '이중사출' 방식이다. 애초에 인쇄가 아니기 때문에 지워지지 않는다. 다만 ABS재질이라 POM이나 PBT재질보다는 마모가 잘 되어 소위 '번들거림'이 있다. 난 어차피 번들거림은 신경 안쓰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 변형 백축(줄여서 변백) 스위치의 키감이 궁금하여 AT방식의 오래된 키보드마저 중고장터에서 지르게 되었다. 그것도 현재의 신품을 사고도 남는 13만원이라는 거액을 들여서.. 그것이 아마도 변백으로 추정하고 있는(전주인도 변백인 것 같은데 본인도 확신은 안든다고 한다.. 따라서 그냥 구백축일 수도 있다) G80-1800HEU다. 


맥은 커맨드키가 매우 중요한데, 구형 키보드에는 윈키가 없어 캡스락을 컨트롤로 바꾸고 alt와 원래 컨트롤 자리를 바꾼 뒤 위의 혼자 진회색인 키캡 자리를 커맨드로 설정했다. 원래 그 자리에도 정확한 키캡이 존재하는데 헷갈리지 말라고 사이즈 맞는 잉여 키캡을 꽂아두었다. 

키감? 재미있다. 조물딱거리는 소리가 나서 연구실에 다른 분들이 있을 때는 쓰기가 좀 그렇지만.. 그나마 체리 순정 갈축보다는 통울림이 적어서 눈치 보면서 쓰고 있다. 아마도 전 주인들이 여기에 뭔가 이것저것 튜닝을 해둔 것 같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 동안 키보드매니아에도 비록 온라인상이나마 몇몇을 알게 되었고, 번개에도 한 번 참여하여 메일로 많은 도움을 받은  '낭만곰'이라는 분과도 인사하고 술도 한 잔 했다. 느낌은.. 번개는 게임이던 키보드 동호회던 다 비슷한 느낌이 있다. 만나면 아이디에 님자를 붙여 부르고, 친한 사람들은 많이 친하고.. 만나면 키보드 얘기, 살아가는 얘기 하고. 여하튼, 신기한 경험이었다. 

KMAC은 적축으로 넣을 것이고, 이후에 청축도 하나 만들고 싶다. 음.. 키캡이 하나 남으니,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봐야겠다. 어차피 스위치가 청갈흑적백 밖에 없으니, 그 5종 중 하나거나 그것의 변형이 되겠지. 아니면 키캡만 뽑혀 나온 불쌍한 키보드를 입양해서 쓸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한 번에 쓸 수 있는 키보드는 하나 뿐이다. 놓고 다녀봤자 두 군데, 주력으로 쓸 놈은 둘 뿐이다. 차후에 조립할 두 키보드는 아내와 아기를 위해 만들고 싶다. 각자 좋아하는 키감을 고르게 해서 정성들여 납땜해주고 싶다. 그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 같다.

기계식 키보드의 좋은 점은 오래오래 쓸 수 있다는 데에 있으니..  평생 쓸 수 있기를.. 

덧글

  • zonam 2013/02/19 11:22 # 답글

    훗 알프스도 있었다는 걸.. 이때는 몰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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